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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장사로 성공하는 열두가지 전략
작성자 : 2 전문가
등록날짜 : 2009.01.08 08:49
4,043

       먹는장사로 성공하는 열두가지 전략
    출판사:창해
    지은이:강석우

        1. '달호'라고 불리운 남자
    뿌린 만큼 거두는 먹는 장사
  '먹는 장사.' 여러분들은 이 단어만 들어도 왠지 천박하거나 쉬워 보이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식당집 아저씨'란 단어 역시 그리 고상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들린다. '밥장사.' 이건 더더욱 안
좋은 냄새가 난다. 이러한 느낌이 오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우리의 의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례로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가 졸업을
하자마자 식당을 한다고 나서면 그 집 식구들은 물론 주위의 친지까지 다들 한마디 하고 나설
것이다. "그래 기껏 대학공부 시켜놨더니 겨우 식당이냐?" 혹은 "세월이 아깝지도 않냐? 등록금이
아깝지도 않냐고?" 무리하게 추측하지 않아도, 아마 이 정도의 반발은 능히 가능하리라 본다.
  그러나 대학 나온 사람들이 다 넥타이 메고 다 컴퓨터 앞에 앉으려 들면, 그 인텔리 직장인
점심은 누가 만들며, 오랜만에 애인과 데이트 길에 나설 때, 멋진 레스토랑의 근사한 식사는 누가
다 준비하랴? 요즘 세상에 대학 나온 사람 다 빼고, 집안 좋은 사람 다 빼고, 잘난 사람 다 빼면
남는 게 사람이랴?
  정말 우스운 사고가 아닐 수 없다.
  대학을 예비직장으로 알고 달려가는 젊은이들도 문제지만 대학을 못 가면 인간대접 받기는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의 걷잡을 수 없는 피해의식이 더 큰 병이다.
  지난 시절 우리 사회는 대학졸업장만 있으면 사무실 책상 하나 내주던 시절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며 앞으로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나온 사람은
고상한(그리 고상할 것도 없지만) 직장엘 가야 한다는 이 논리는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일까?
    좋은 사업
  먹는 장사는 참으로 고귀하고 순수하며 사명감 있는 사업임에 틀림없다. 맹물로 가는 차
없듯이, 기름 없이 가는 차는 상상할 수 없듯이, 밥 못 먹는 사람이 숨쉴 수 있는가?
  먹는 장사는 곧 생명을 보장해주는 고귀하고도 사명감 있는 사업임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순순하고 정의감 있는 사업이 도 어디 있단 말인가? 본인이 이 장사를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곰곰이 생각해봐도 정말 좋은 사업이다.
    먹는 장사를 하자
  정성스레 음식을 장만하고 내 집으로 손님을 모셔 그 음식을 대접하고, 또 그 손님들은 나의
노고를 약정된 돈으로 지불하고, 난 그 돈으로 그 다음날을 준ㅂ하고... 얼마나 정겨운 내용인가?
나는 감히 외치고 싶다.
  젊은이들이여! 먹는 장사를 하자. 그 젊음, 그 기지, 그 참신한 지혜를 가지고 내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즐거움을 나눠주고, 내 노동의 대가가 늘어남을 기뻐하는 도시의 농부가 되자,
농부들은 말한다. 땅은 정직하다고, 심은 만큼 돌려준다고. 도시의 농부들도 말한다. 음식은
정직하다고, 땀흘리고 신경쓴 만큼 되돌려준다고....
  먹는 장사는 자기가 가진 지혜를 쏟아 부음으로 해서 그 결과가 놀라우리 만큼 정확하게
표현되고 그 대가는 엄청난 보답을 한다. 물론 직장이라는 조직에서 찾는 보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음식업처럼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능력을 과시하기 좋은 직업은 그리 흔치 않다.
음식업은 남을 짓밟고 올라서려고 아우성칠 필요도 없으며 음모와 계략으로 빠른 성장을 도모할
이유도 없다. 물론 모든 직장인이나 다른 사업을 진행하는 이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나는 원한다. 도시의 잘생기고 예의바르고 총명한 젊은이들이 저마다의 참신한 아이템을
가지고 우리의 거리를 화려하게 꾸며줄 날을... 기묘하고 멋진 가게들이 이 골목 저 골목에 있어
어느 식당을 가도 색다른 분위기와 음식이 기다려준다고 상상을 하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그 날을 기다리며 마음의 축복을 보낸다.
    꿈 이야기
  나에겐 꿈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크기에 차이는 없겠지만 꿈은 있게 마련이다. 그 꿈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주
모양을 바꾸지만, 간혹 처음의 꿈이 그대로 간직되는 경우도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나의 어릴 적 꿈은 가수
  나의 경우 역시 어릴 적 꿈과 지금의 꿈은 변해 있지만, 그것은 나의 마음이 변질된
것이라기보다는 당연한 모양 바꿈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나의 어릴 적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공부를 딱 싫어하던 나는 유독 노래부르기를 좋아했고 춤추기를 즐겼다. 내 초등학교 시절엔
남진, 나훈아, 하춘화, 문주란 등의 가수들이 유명했으며, 특히 남진과 나훈아의 인기는 대단했다.
  오늘 나훈아가 쇼를 하면 며칠 후엔 건너편 극장에서 남진 리사이틀이 열리곤 했다. 노래를
좋아하던 나는 쇼를 구경할 돈이 모자라면 어떻게 돈을 모을까 하는 궁리에 젖어 며칠을
고민하곤 했다. 궁리 끝에 방법이 나오지 않을 땐 극처방을 내리곤 했는데 그건 다름 아닌
'빠방'이라는 방법이었다.
    똥통을 통해 몰래 보는 쇼
  '빠방'이라는 말은 돈을 내지 않고 몰래 들어가는 행위를 일컫는 일종의 은어였다. 그 '빠방'의
방법은 목표로한 극장의 건물구조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었다. 특히 그때의 극장 화장실은
지금처럼 수세식이 아니고 긴 막대기 끝에 군대에서 쓰던 철모나 깡통 등을 매달아서 그걸로
똥을 푸는 재래식이었기에 똥을 저장하는 탱크로 들어가 똥누는 변기 위로 빠져나오는(물론
겨울이 아니면 이 방법은 불가능했다. 똥 속에 잠수는 못하니까) 방법에서부터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저씨에게 사정해서 그 어른의 손을 잡고 마치 아들인 양 시침떼고 들어가는 방법(이
방법은 얼마 후엔 얼굴이 알려져서 거의 불가능했음), 또는 1미터 조금 넘는 기도석(표 받는 곳)
밑으로 바짝 붙어 기어가는 방법 등이 있었다.
  그런 방법으로 극장에 들어갔다가  들키는 날은 이마에 빨간 페인트로 '빠방'이라고  쓰고 온종

극장 청소를 했으며 동네어른들이 그걸 보고 부모님께 이르는 날은 그야말로 '눈물로 이
밤을'이었던 것이다.
  그때 이마에 찍힌 주홍글씨를 지우던 노력은 지금도 새삼 지겨움으로 남는다.
  여하튼 그러한 쇼를 보고 오는 날이면 끼니도 미룬 채 거울 앞에 서서 그날 눈여겨봐 두었던
가수의 제스처를 흉내내며 열심히 그 가수의 노래를 불러보곤 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학창
시절 소풍 때면 으레 단골가수가 되곤 했다.
    대성황을 이룬 보컬그룹 worlds
  그러다가 그러한 열망은 드디어 말썽 많이 부리던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음악에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worlds라는 보컬그룹을 만들게 했다. 그 첫 번째 공연은 그 당시 청소년회관 2층에서
'불우이웃돕기'라는 제명 아래 음악 발표회를 했고., 2회는 대전 가톨릭 문화회관에서, 3회는
지금은 없어진 대전 대흥동 자유극장에서 열렸었는데 그때(76∼77년)만 해도 학생들의
휴식문화가 전무한 상태에다 보컬그룹이라는 생소함까지 겹쳐 매회 마다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다.
  일례로 그때 마침 대전역 앞 아카데미극장에선 하춘화 쇼가 있었고, 자유극장에서는 worlds의
세 번째 공연이 있었는데 하춘화쇼를 하는 아카데미극장은 반쯤 객석이 차있었고 자유극장 앞은
채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도로에 밀려 급기야는 몇 명의 교통순경까지 동원되는 진풍경이
벌어졌었다.
  3회 공연 때는 무대에 올라보니 준비해놓은 마이크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들이 아침조회 때
쓰는 'ㄱ자형' 약장수 마이크였다. 큰일났다 싶었지만 시간은 이미 약속한 시간에서 무려 30분
이상이 지나 더 어찌해 볼 겨를이 없었다. 한두 곡이 끝날 즘 안 들린다고 아우성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대여섯 곡이 나갈 무렵엔 뒷부분의 관객들이 앞으로 나오려다 앞에 있는 사람들이
깔리고 밀리는 바람에 아수라장이 되는 불상사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웃음만 나오는 추억으로 남는다. 여하튼 그러한 성원에도 불구하고
worlds는 그 3회 공연을 끝으로 해체를 맞이하게 됐는데, 그때는 젊은 문화에 대한 이해가 크게
부족했던 대인지라 공연장소를 빌리는 것을 시작으로 연습장비, 연습장소, 연습기간 동안 의
경비, 부모님들의 무차별한 만류 등등 너무도 어려움이 많았다.
    닭서리
  언제인지는 뚜렷이 기억나지 않지만, 연습도중 하도 허기가 져서 동네에 밤잠 안 나고 노니는
닭을 느닷없이 발로 걷어차 실신시킨 다음 끓는 물에 펄펄 끓여 소금도 없이 여러놈이 달라붙어
뼈만 남겼다. 먹고 난 뼈는 증거인멸을 해서 진놈이 모래를 묻혀 싹싹 닦아 기름기를 없앴다.
오랜만의 포만감을 즐기며 기분 좋게 잠이 들었던 우리는 벼락치는 소리에 놀라서 잠이 깨었다.
  그리고는 모두 끌려갔다. 파출소로...
  아니라고, 모른다고 도리질하던 우리들은 수채망에 걸려 잇던 닭털이라며 득의 만만해 하는
뒷집 여자에게 결국 거금 2만원을 바치고, 각서 쓰고 풀려났다. 그때 돈 2만원이면, 닭 20마리는
살 수 잇는 값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 비싼 닭이다.
  그로부터 2년 후인 79년 가을, 대전 최초로 고고 클럽이 탄생했다. '사모니'라는 이름의 그
클럽에서의 활동을 시작으로 그 당시 중앙관광호텔 6층 미드나이트, 9층 킹돔나이트클럽,
유성관광호텔 속리산관광호텔, 청주,부산의 몇몇 클럽 등등에서 2년여 동안 음악활동을 하다가
입영통지를 받고 군에 입대하게 됐다.
  그때는 별로 이름이 없었지만 지금은 독자들도 알만한 연예인들과의 에피소드, 그리고
밤무대의 크고 작은 이야기 등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지만 그 이야기를 다 하기엔 이
책의 정해진 지면이 허락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필자가 글을 쓰게 된 취지에 혼선이 올 것 같아
그냥 지나침이 못내 아쉽다.
    군발이 달호
  군에 입대하던 날은 날씨마저 썰렁하여  무척이나 울적했다. 집결지인 충무체육관이 꼭 도살장
같았다. 박박 밀은 머리가 늦가을 바람에 시려웠는지 아님 어색했는지 모두들 방울 달린
빵모자를 쓰고 있었다. 유독 나만 어깨까지 머리를 늘어뜨리고 그들 속에 서성거렸다. 아는
얼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애꿎은 담배들만 죽이고 있었다.
  지금은 유명한 개그맨이 된 최병서가 보온병 뚜껑에 커피를 따라 권했다. 그는 나의 학교
후배이자 절친한 후배였다. 그런 관계로 그와는 많은 기억들이 있는데, 그 중 몇가지는 지금도
가끔씩 생각이 나곤 한다.
  워낙 붙임성이 좋고 쾌활했던 그는 어쩌면 유명 개그맨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확실치는
않지만 학창시절 응원단장이던 내 뒤를 그가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군대를 제대한 후에도 내가 외제옷 장사를 하던 백화점 가게에서 개그맨 콘테스트를 대비해
연습을 했고., 나는 대화장인 서울로 쫓아가 응원을 해주곤 했다.
  그렇게 절친했던 그와 지금은 연락도 없이 지낼뿐더러 수년 전 우연히 서울 풍전호텔 로비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달갑지 않은 얼굴로 서로 어색한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우리가 그렇게
된 이유에서 나는 최병서의 괜찮은 인간미를 보았다.
  어느 날 아침 일찍 가게를 찾아온 병서는 심각한 얼굴로 "태호형이 죽었대." 했다.
  그러자 나는 "태호가 죽다니? 아니 무슨 일로?" 하니 "아니 형,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태호형
나이가 몇인데." 하며 벌컥 화를 내자 나도 화가 나서 "야 임마, 나도 친구니까 그렇지. 그럼
뭐라고 하는 건데 00야!" 하자 어이없다는 듯 입벌리고 쳐다보다 휑하니 나가버렸다. 그 후론
그가 날 찾지 않았는데 후에 알고 보니 동명이인이었다. 지금까지도 병서가 오해를 하고 있다면
이 글보고 풀었음 싶다. 여하튼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 들은 아버지 회사의 부도소식
나는 광주에 있는 상무대 욱군포병학교의 조교로 근무하게 됐는데 그럭저럭 사연 많은 군생활에
익숙해지던 일병시절부터 들랴오는 집안소식이 심상치가 않았다. 집안의 가세가 기울고 있음이
느껴졌다. 군 입대 전까진 그래도 대전에선 내노라 하던 부잣집이었기에 구태여 세상물정에 대해
그리 관심을 갖고 있지 않던 나는 점점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군에 입대할
당시만 해도 군 입대를 모면할 방편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내 멋대로 누구의 제약 없이
살아온 나날에 변화를 원했으며 내 인내의 한계를 느껴보고 싶었고,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그렇게 멋있는 제목으로 사서 고생하러 왔는데 이거
잘못되면 제대 후엔 평생 고생하게 될 판이니 어찌 고민되지 않겠는가!
  드디어 상병 달고 군생활이 저물어갈 즈음에는 그 많던 재산 다 날리고 오류동 공장부지에
방을 여러 칸 들어 월세를 받아 생활하게 됐고, 여유롭지 않을 생활을 돕고자 어머님이 방앗간을
하시게 됐다는 동생의 얘기를 듣고는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날 밤 유난히 달이 밝던 부대의 정문초소에서 보초를 서며 지난날을 하나씩 되짚어보았다.
지지리도 공부 못했던 초등학교 시절 그래도 자식이라고 아버지께선 우리 학교에 유일하게
가죽부추를 ㅁ추어주셨고 학교에 피아노까지 들여놓으시며 육성회장을 맡아주셨지. 선생님들도
지지리도 공부 못하고 말썽만 피우는 놈을 아버지 얼굴 하나 보고 억지 칭찬을 해주셨다.
 '아!, 난 왜 이리도 못난 놈인가!'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 꼬시는 데는 천재
  어릴 적부터 난 유난히 욕심이 많았다. 나에겐 나보다 한두  살 어린 사촌형제들이 몇 명 있었
다. 집안 경사 때 가끔 그들과 만나면  슬슬 날 피했다. 워낙 욕심이 많고 사나운지라  같이 무슨
일을 도모해서 득될 게 없으리란 판단들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매번 나의 유혹에
빠졌고, 또 그 결과는 그들이 염려하던 대로 돼버리곤 했다.
  나의 그 많은 만행들을 다 열거하려면 이 책은 5편가지 이어져야 한다. 어머님이 그러셨다. "조
선천지에 너 같은 놈 또 어디 있으랴." 대여설 살 때엔  하도 자주 없어져 내 옷마다  주소와 전
화번호를 적어서 꿰매놓으셨단다. 길에서 놀다가 조금만 이상한 차가  나타나면 죽어라 달려갔다.
한참을 뛰다보면 어디로 왔는지도 모르겠고 결국은 파출소에서 순경님들 자장면이나 축내고 곤봉
휘두르며 놀다가 유리창이나 깨고, 아니면 낯모르는 집  안방에서 8자로 잠들었다는 연락을 받고
온 어머님이 집으로 나르곤 했다. 별일 없는 날은 자기 키보다 더 큰 개를 끌고 와서는 누가
줬다
고 박박 우기다 맞기도 많이 맞았다. 개를 좋아라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한 만행은 중고등학교시절에도 이어져 숱한 싸움과  사건 속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냈다. 내
가 없는 늦은 시각에 전화가 울리면 어머니는 말부터 더듬기 시작했다. 허구한 날 맞은 놈 돈 물
어줘 파출소로, 경찰서로 치고 달리고...
    회고의 눈물을 흘리며
  언젠가는 간첨으로까지 몰려 우리 집보다 더  큰 방첩부대차가 오질 않나(나중에  알고 보니
모 여학생의 부탁으로 써준 웅변원고가 잘못 이해되어 생긴 소동이었음), 내 시계 내놓으라고
여학생이 집에 찾아오질 않나, 학교에서는 퇴학시킨다고 연락 오고, 학교 가서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하고 돌아오면, 내일 놓을 어머니 겟돈을 들고 도망갔다.
  돌이켜보면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남으셨나 싶다.  음악생활 할 때도 노래가 잘 안
되면 다음 스테이지고 뭐고 간에 그냥 내려와 돌아다니다가 무대로 돌아가면 경음 악연주로 시간
을 때우던 동료들이 펄펄 뛴다.
  다시 무대에 올라 한두 곡 불러봐도 시원치 않으면 막공갈팝송 부르고 욕도 했다.(물론 음악이
시끄러운 때에만), 그런 줄도 모르고 손님들은 즐겁게 춤추고  오예오예 어쩌구 난리통이다. 그래
그래, 다 좋은데 이젠 워쩐다냐. 뭐해서 먹고 살지?
  보초근무를 끝내고 막사로 오르는 오솔길을  걸으며, 지난날 기억들을 더듬던  나는 땀내 절은
작업복에서 M-16소총을 맹 스물두 살, 살아갈 날이 한참 남은 젊은 머슴아로 되돌아왔다.
    이젠 워쩐다냐?
  그날 밤 종일 근무 속에 여느날 같으면 머리를 바닥에 대기가 무섭게 곯아떨어졌을 시간인데도
눈이 말똥말똥, 머릿속엔 별의별 것들이 다 날아다니고  귀에서는 천둥, 벼락, 세상을 프라이팬에
지지고 볶는 소리로 인해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맞았다.
  징그럽게도 일어나기 싫은 아침, 그래도 제목은 희망찬 새아침, 찌그러진 세숫대야를 들고 우물
장에 내려가다 보니 아직도 아침의 서운한 눈곱들의 방해로 사람이 이중삼중 제멋 대로다.
  그대로 나의 모든 만행들을 가족이라는 미명 아래  묵묵히 감수했던 그들, 내가 생각해도 징그
러운 나를 아들이라고, 형이라고, 마냥 용서로 일관한 나의 식구들... 그들이 힘들어 하고 있다. 그
들이 어려움 속에 빠진 거다. 이젠 내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 그래 나도 뭔가 보여줘야 된다. 나
라고 하구한 날 나쁜 짓만  일삼는, 자기인생 들기기에 급급한 그런  놈팡이로만 남아 있을 수는
없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해야 내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지금의 어려움
속에서 건져낼 수 있는 건가. 불행히도 그때까지 내가 지니고 있던 나의 희망사항들은 돈과는 거
리가 멀었다.
  나의 꿈은 전세계를 떠돌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  꿈의 실현을 위해 막연하나마 팜송도 열심
히 연습했고(생활비가 어려울 땐 거리에서 동냥하려고), 어떠한 고생도 감수하리라는 각오도 대져
보곤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외국을 나간다는 것은 거의 꿈에 불과 했으며 지금처럼  서울과 부산을 오가듯
아주 손쉽게 외국 구경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는 예상을 그 누구에게도 들어본 기억이 없을
때였는데 무슨 배짱으로 내가 외국을 떠돌다가 죽도록 이 땅이 그리울 때  다시 돌아온다며 마치
내일 떠날 인간처럼 설쳐댔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어렵다.
  여하튼 이제는 그런 희망들은 상하지 않게만 잘 보관해 두었다가 좋은 시절  만나면 그때나 풀
어볼 일이다.
    밤새 생각해둔 세 가지 장사
  지하 2백 미터에서 올라온다는 차디찬 얼음장 물로 세수를 마치자 그제야 겨우 세상이 눈에 들
어왔다. 
  아침식사는 고춧가루 한점 없는 허연 무국에 수저를 다그며 다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제
대 후 시도해볼 만한 돈벌이... 지난밤 내내 생각해 둔 세 가지 장사가 떠올랐다.
  첫째, 외재옷 장사다. 그 당시 외제옷은 거의가 '물자'라는 이름의 중고품이었다. 아마도 6 25전
쟁 이후부터 들어오던 미국의 구호물자를 일컫는 말인  듯싶었다. 그 시절 멋쟁이들 사이에는 대
단히 인기가 있었다.
  둘째, 일반 사람들의 심리가 자기는  안 먹고 안 입어도 자기새끼(?)한테는  아끼지 ㅇ낳는다는
점에 착안, 그 당시의 일반적인  수준보다 제품의 질을 높이고,  이쁜 제픔만을 골라서 판매하고,
대신 가격은 조금 더 비싸게 받는다. 타이틀은 '아가방'이라고 해서 시작해보기로 하였다(물론 가
게의 인테리어도 제품에 걸맞는 고급스런 치장을 한다는 설정하에).
  셋째, 분식집이다. 지금이야 이쁘고 깔끔한 분식집이 많이 생겨났지만 그 당시만 해도 포장마차
나 기껏해야 서너 평짜리 크기에  바닥은 시멘트로 되어 있고, 막책상  몇 개 좋은 집뿐이었기에
싸고 맛있는 군것질 종류를 레스토랑 같이 깔끔하고 그럴듯한 가게에서 판매한다면 분식
이용고객
의 80∼90퍼센트가 젊은 층이므로 충분히 매력적일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 중에 일단 위의 세 가지 방향을 잡고나니 조금은 머리가 가라앉았다.
  나는 이런 생각들을 일기장에 꼼꼼히 적어놓았는데, 내가  선택한 세 가지 장사에 대한 공통점
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는 지극히 대중적이라는 점이며, 둘째는 자본금이 많이  필요치 않다는
점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내 처지를 감안했던 것 같다.
  나는 실패해서 안되는 상황이었기에 지극히 대중적인 바탕 위에 신선한 아이템을 접목시킴으
로해서 대중의 반복횟수가 잦은 장사를 해야 한다는 기본틀을 바탕으로 나온 생각들이었다.
  불과 하룻밤의 설계로 진로결정을 한다는 것이 좀 마음에 걸렸지만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나
거대한 역사도 그 결정은 찰나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자 낙천적인 내 마음은 벌써
동료들과의 쑥덕공론에 가 있었다.
    선수용 빼앗긴 아가방

  며칠 후 대대에서는 안전웅변대회가 있었고 나는  일 등을 해 일주일 포상휴가를  얻어 대전에
갔다. 전에 한없이 쏘다니던 시내거리, 뚜렷한 할 일 없이 같은 거리를 몇 번 걸어도 지겹지 않은
이 거리, 지나치는 사람들이 모두 구경거리,  어쩌면 저리 한결같이 생긴 게  제각각일까? 전에는
저쪽 모퉁이에 저런 옷가게가 없었는데,  맞아 그전에는 그곳에 레코드점과 안경점이  있었고, 그
앞 버스정류장엔 시내 분위기에 취한, 아니 젊음의 마술에 걸린 가시나랑 머슴애들이 레코드점에
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발바닥 장단을 맞추다가 누가 쳐다보는 듯한 기미가 보이면 누굴 기다리기
라도 하는 것처럼 괜한 시계만 쳐다보곤 했지.
  실은 나도 그 버스정류장에 서 있길 즐겼는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사랑과 평화의 '장미
'
라도 나오면 괜히 행복해지곤 했다. 지난날을 회상하며  여유롭게 시내를 거닐던 나는 갑자기 넋
이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동양백화점 뒤편에서 글씨 하나 안  틀린 '아가방' 이라는 간판과  함께 핑크빛으로 꾸민 이쁜

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역시 세상은 나만

똑한 게 아니야. 아니 세상은 조금 주춤거리면 모든 걸 다 뺏기게 되어 있어.
  집에 돌아와 나는 노트에서 '아가방'이라는 글자를 지우고 그 자리에 이렇게 썼다. '꽥'.
    새로운 시작

  군에 오기 전 새로운 세상을 느껴보자며 씩씩하게 밀고 들어왔던 국방색 철문...
  참으로 기고만장한 군대생활을 어찌 글로 다하랴.  이쁜이 소리를 들었던 쫄병시절,  이래도 웃
고 저래도 웃던 이쁜이 일병시절, 웅변대회로, 군가경연대회로,  나 자신의 대견함에 흐뭇했던 나
날들, 터무니없는 군의 생리에 몸으로 부딪혀 몸부림쳤던 고통의 나날들...
  갈 수 없어 안타까웠던 저 바깥 세상의 요란한 굉음들,  힘든 작업 끝에 벌컥벌컥 들이켰던 꿀
맛 같은 막걸리와 두부김치, 세상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던 반합 속의  군대라면, 죽어라고 꼴찌만
걸리던 휴식시간의 사다리... 자 이제 모두 안녕이다. 수염 깎는 동물들의 아름다운 시간들...
  나는 두 ㅍ이 겨우 됨 직한 코딱지 만한 방에 두발을  곧추어 괴고 구석에 몸을 처박고
있었다.
창문 사이로 비치는 희망과 욕망의 햇살이 자꾸만 낯설어 그 빛을 피해 온방을 한바퀴 돌고 나면
하루가 지나곤 했다. 그런 나날이 제법 지난 후에야 나는 어쨌든 움직여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나의 첫 번째 사업은 전자에 언급한 생각 중에서 가장 투자금액이 적은 외제옷 장사였다. 지금
은 대전백화점이 있는 대전천변에 그 당시 신도백화점이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그 백화점의 운영
상태가 좋지 않던 관계로 아주 적은 돈으로 이층에 가설점로 두 평 정도를 빌려 장사를 시작하게
됐는데 장사가 신통치는 않았지만 워낙 알뜰히 생활한 덕에 조금씩  조금씩 창업자금 50만원을
갚아나가고 있었다.
    낮에는 행상으로, 밤에는 밤무대 가수로
  한두 달은 그럭저럭 되던 장사가 같이 시작한 옆  점포(8개의 외제옷 점포가 동시에 시작했음)
의 젊은 친구들이 물건을 팔면 그 돈을 모아 다시 물건을 채워놓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노름당
구와 술로 탕진하고 장사가 안된다며 한두 명씩 빠져나가  구경오던 손남들도 점점 줄어들어 드
디어는 팔다 남은 옷들을 챙겨들고 길거리로 나가 행상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때 새로운 경험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훗날 나의 사업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그
경험이란 어떠한 일을 시작할 땐 그 당시의 정황도 중요하지만 일이 진행되면서 예견되는 주위의
변화까지도 보아야 하며, 일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그 일에 미칠  수 있는 영향 등을
면밀히 검토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한적한 땅에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멋진 레스토
랑을 지었다 하자.
  열심히 노력하여 많은 손님이 올 때쯤에 그 레스토랑 옆의 공터에 누런  양철로 조립식 단층건
물이 들어서더니, 커다란 간판에 빨간 글씨로 '한국정육백화점',  또는 '탕전문' 이렇게  씌어졌다

그건 보통일이 아니다).
  추운 겨울날 시린 발을 동동거리며 행상을 하고 있자니 날 아는 옛  친구나 선후배들은 옛날엔
잘 나가더니 폭삭했구나 하는 축도 있었지만 남부럽지 않던 애가 저렇게 열심히 노력한다고 대견
해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평가는 남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이므로,  난 아무 신경도
가지 않았다. 오로지 돈, 돈을 벌어야 했다. 물론 집이 망했다고 끼니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집안을 키우고 자신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막연히 하루하루를 살아
가는 불쌍한 인간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잖은가? 하는 압박감뿐이었는데 그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지당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널린 그 많은 돈들은  이제 막 사회의 문턱을 들어서는
스물네 살 풋내기 장사꾼을 거들떠보질 않았다.
  생활은 그렇듯 고생스러웠지만, 어렵고 힘들수록 마음을 오기로 다독였고,  입고 다니는 옷이나
언행은 전과 조금도 틀리지 않게, 반듯하게 하고자  노력했으며 조금도 현실의 고충을 남에게 피
력하지 않았다. 난 밤마다 뻣뻣하고 후끈히 얼굴과 튼 입술로 고통받곤 했다. 그러나 그 덕분에

그나마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첫 번째 장사의 실패

  언젠가는 하루는 "한 장에 오백 원" 하고 한참 흔드는데 무엇인가 잡아끄는 느낌이 왔다. 길건
너 우체통 옆에 검정투피스를 입고  머리를 곱게 늘어뜨린 웬 여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입대
전 몇 번 만난 적이 있던 그 여자는 불에 덴  듯 놀란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적으
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모모씨, 옷 하나 팔아줘"라고 필요
이상으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물론 그 여자는 황황히 그 자리를 피해버렸지만...  결국 나의 첫
번째 장사는 실패작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낮에는 행상으로, 밤에는 밤무대 가수로, 열심히 노력해봤지만 이 일들을 성공으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속에서 다시 시도한 보컬음악 일 년, 단종주택사업 일년, 그리고  일 년간의 허송세
월...
  나는 서서히 지치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이래선  안되는데' 하면서도 자꾸 안으로 움츠러들고
있었다. 지난날을 더듬으며 나의 문제점을 찾으려 여러 날을 고민했다. 내가  찾은 자신의 문제점
중 가장 큰 비중을 둔 것은 '나는 사회경험도 부족하고, 장사자본도 여유롭지 않은 상태여서 나무
조급하게 일을 추진했고, 나무 성급하게 실패를 자인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나는 자꾸만 나약해지는 나 자신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새로운 투지와 차분하고도 침착한 안정
감을 불어넣을 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새로운 투지로, 새로운  희망으로 새출발을
하고
싶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머릿속에는 엉뚱하게도 '결혼'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그것은 놀라운 발
견이었다. 이 어려운 때 결혼이라니...
  그러나 나는 그 글자가 지닌 매력에 며칠을 빠져 있었다. 무언가 구심점을 찾지 않고서는 나를
어떠한 열정에 몰아넣을 수가 없었다.
  내가 사랑을 불어넣을 수 있는 여자, 나를 격려하고 위로할 줄 아는 여자, 내 지친 영혼을 흔들
오 일깨워줄 여자, 내가 그 가슴에 안주해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가슴이 무지 큰 여자, 여자, 여
자...                                                                                      
    달호의 공수표                                                                         
  지하도를 걷고 있었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는 김종무라는 절친한 친구와 함께 젊음이  넘치는 거리로 나
가 하릴없이 걷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수많은 눈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쇼윈도로, 이쁜 여자 궁둥이로, 쭈그리고 엎드린 나이 먹은 거지
들으로, 그때 한 여자를 보았다.
  무엇이 그리 그녀를 즐겁게 했는지 옆에 같이 걷는 친구 귀에 비밀스레  소곤거리며 깔깔 웃고
있었다.
  그때 내 마음속에 무엇인지 움찔했다. "아가씨 잠깐만요, 바쁘십니까?" 여자를 어찌해 보는데는
일가견이 있다는 주위의 평도 있고 해서 서슴없이 말을 건넸다.
  그러자 별로 바빠 보이지 않던  그녀가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특유의 끈질김으로
밀어붙인 결과, 이윽고 약속시간과 장소를 받아내었다.
  드디어 약속한 날, 내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근사한 옷을 입고 약속장소인 '로즈가든'으로 나
갔다. 기다리길 한 시간, 기도하며 한 시간, 오기로 버틴 한 시간,  도합 3시간을 기다리다 밀걸레
로 발까지 툭툭 밀며 노골적으로 눈치주는 웨이터와 급기야는 한바탕하고 그 장소를 떴다.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어요                            
  그 후로 그녀를 다시  만난 건 대전의 유명한  목척교 위에 있던 '한미외국어학원'이었다(나는

때 외국에 나가 음악생활을 해보리라는 막연한 꿈을 갖고 영어회화를 배우고 있었다.). 그녀는 일
어를 배우고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일어를 가르치는 선생 눈에 영락없는 악마가 되어버렸다. 그러
나 줄기찬 시도에도 반응이 없었다. 가뜩이나 날카로운 얼굴에 하필이면 그때 파마를 한 것은 그
야말로 운명의 장난이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내가 영락없는 건달같이 보이더란다.
  창피한 고백이지만 없는 돈에 옷도(특히 점잖아  보이는 양복) 많이 사 입었다.  어떻게 해서든
뜻을 이루어야겠기에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비도 조금 오고 기분도 별로 좋지 않던 어느날, 나
는 벼락을 맞고 말았다.
    모든 걸 포기하고 음악을 하러 떠났다.
  그녀가 두눈을 부릅뜨고 나에게 한 말은 "나  정말 그대가 딱 싫어요." (그 소리 듣고도  또 옷
사면 정신병자지) 나는 그날 부로 그녀의  상대역을 포기해야 했다. 막상 포기를 마음먹으니
마음이 허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고 온갖 것이 다  거슬리고 짜증만났다. 나는 그런 나날이 너
무 싫어 마음을 다잡을 심산으로 팀을 만들어 경북 점촌이라는 시골도시로 음악을 하러 갔다.
  그곳에서 제일 크다는 나이트클럽에서 음악을 하게 됐는데 우리가 일하기 한 달  전에 그 당시
는 유명세가 대단했던 '신중현과 뮤직파워'가 두 달 동안 일하다 갔단다.
  점촌에서 제일 큰 업소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유명한 양반들이 이런 시골을 어찌 왔는가
싶었다. 두 달 동안 시골에  묻혀 낮에는 산과 들로 유랑을 하고  밤이면 음악 속에
빠져들다보니
차츰차츰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는  그녀와의 기억이 지나간 시간이라고 생각할
즈음
에 예비군훈련이 있어 집엘 가게 됐다. 대전에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시간에 쫓겨 서둘러

복을 걸치고 군화를 신는데 안방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군화를 풀기 귀찮아 무릎발로 안방
엘 들어갔다.
  "여보세요?" 여자였다. 나는 버릇대로 "누구냐?" 하고  응답했는데 대답이 없었다. 나는 짜증스
레 다시 물었다. "누구냐구?" 그때 들려오는 저편의 목소리는 바로 그녀였다. "저예요, 기억하시겠
어요?" 아이구 소리가 절로 나왔다.  "네? 시간요? 아, 있구 말수요.  시간이 남아돕니다." 이말이
내 발에 족쇄 채우는 소리란 걸 그때는  몰랐다. 지금은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안방을  같이 쓰는
여자를 나는 이렇게 만났다. 객지로 떠돌던 내기 그 시간에 전화를 받게 된  것도, 죽어라고 빠지
던 예비군훈련을 받으려고 마음먹은 것도 그녀와 평생 붙어 살라는 운명의 통지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몇 번 해본적이 있다.
    결혼, 그리고 끔찍한 가난
  결혼식을 하고 나는 집에서 TV만 보았다. 신혼생활이 시작됐지만 나의 생활은  힘들기만 했다.
겨우겨우 끼니만 이으며 둘이 껴안고만 살았다. 친정집과  처갓집 두 군데 모두 여유롭지 않았
고 주위에는 도움을 줄 만한 사람들이 없었기에 우리는 가난함을 젊다는 이유  하나로 견딜 만하
게 생각하고 지냈다.
  급기야는 총각시절에 유일한 취미로  모아두었던 카메라를 하나씩  하나씩 팔아먹고, 전당포에
잡혀도 먹었다. 카메라 하나 팔아 외식하고, 카메라 하나  팔아 싸도 사고 영화도 보고... 여러 날
을 김치 하나에 물말은 밥을  먹기도 하고, 입덧하는 아내는 돼지저금통을  깨도 칼국수 값이 

나온다고 절망도 하고... 우리는 결국 우리 먹는 건 고사하고 미키와 석키의 식량까지도 걱정해야
할 상황까지 도달했다(미키와 석키는 장모님에게 타낸 결혼예물값으로 산 도벨만 강아지 한 쌍으
로, 우리 이름이 석우, 미문이었기에 암놈은 미키, 수놈은 석키라 이름지었다. 그때 장모님과 부모
님을 속이기 위해 시장에 나가 산  5백 원짜리 반지는 지금도 예물로  잘 지니고 있다. 부모님과
장모님께 이 책을 빌어 잘못을 고백하오니 용서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대전 가장동에 4백만 원짜리 전세를 들었는데,  벽에다 못 하나 박아도 주인이
쫓아오고, 강아지 정원에 똥싼다고 혼나고,  집 앞 청소 안한다고  혼났다. 정말 지금이니까
겁없이
얘기하지만 더럽고 치사하다 야.
    걱정 마라, 걱정마
  여하튼 그렇게 일 년 또 허송세월을 보내다 대책 없이 첫애를 덜컥 낳고 말았다.
  상황이야 어쨌든 애기는 엄청 이뻤다(자기새끼 안 이쁜놈 없다). 애기를 낳고 나니 이젠  좀 겁
이 났다. 물론 낳기 전에도 마누라에게 "걱정 마라 걱정 마. 이 강석우 어떠하든 너 하나 호강 못
시키냐? 지금 이 고생 지나면, 다 애틋한 추억이 될  테니 아무 걱정 말고 즐기는 마음으로 지내
야 해" 하고 말로는 강철수 만화의 김달호처럼  공수표 팡팡 썼지만, 내심 화장실에 앉아 꽁초를
태우며 '이러다가 정말 공사장에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도 없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가끔 들르셔서 맘에 차지  않는 일자리도 던져 놓으시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작은
구멍가게라도 하나 하든지 아니면 막일자리 취직이라도  하라고 닦달하셨지만, 나는 인생을 함부
로 시작해서는 안되며 처음 시작은 나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궤변만  늘어놓고는 또
하루를 물말아 먹곤 했다.
  그럴 때면 내가 생각해도 나 자신이 김달호 같은 인물과 무에 틀리랴 자책도 들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어차피 세상, 똑같은 생김새로 울며 태어나, 같은 시간, 같
은 세상을 살면서 무언가 남보다 다 많이 유쾌하고, 보람 있고, 신나는 세상을 살다 가야 되지 않
은가, 하는 결론에 도달하고, 그 결론에 도달하는 미로를 찾기 위해 많은 밤을 지새곤 했다.
    드디어
  미로에 접근하는 작은 동아줄 하나를 발견했다.  근년 동안 우리 가족의 가장 믿음직한 재산이
었던 서대전 땅(지금은 센트리아 오피스텔이 웅장하게 서 있음)을 팔게 되었다. 아버님과 상의 끝
에 땅을 팔아 우리를 목조르던 부채를  정리(월마다 나가는 이자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
음)하고 부모님은 위헙부담이 작은 여관을 전세로  얻어 운영하기로 했고, 나에게도 작은  가게를
얻을 수 있는 자금을 융통해주기로 했다. 
  나는 가슴이 설레었다. 자, 이제 시작이야... 비록  적은 자금이었지만 나는 이유 없이 자신감이
가져다주는 흥분을 즐겼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흥분감에  잠을 설치고 날이 밝자마자 몸을 단정
하고 여느 날처럼 양말에 세 개비의 담배를  꽂은 채 시내로 향했다(그 무렵  담배에 세 개비의
담배를 꽂은 채 시내로 향했다 (그 무렵 담배값을 아끼기 위해 집에서 나갈 땐 세 개비씩을 양말
에 꽂고 다녔다. 물론 그 세 개비의 담배는 담배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만 불가불 사용했다. 그
러나 대부분 그 담배들은 그냥 남긴 채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담배만
큼은 인심이 후한 덕분이었다).
  그러고는 마냥 걸었다. 걸으며 생각했다. 무얼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무조건 이
유 없이 성공해야 ㅎ나다. 오늘날 이 성공이 내가 긴 날을 꿈꿔왔던 멋진 내 인생의 교두보가 될
것이기에 어떻게 하든 성공해야 한다. 나는 언제부턴가  내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성공을 공언해
왔으며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네들에게 일종의 부채감을  느끼려 했고, 극성은 이내 나에게 최면
을 걸어 성공을 각오하게 만들었다. 남들을 위해 성공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네들에게 실
없는 사람이나 허황된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 되겠기에 더욱 나를 추스리고 몰두하
게 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다 좋은 건 아니었다. 모든 이들이 각자 생각이 다르고,  또 그 개인마다
환경이나 경험이 판이한 까닭에 오해도 많이 받고 의심의 눈길도 느꼈으며 가벼운 사람처럼 보여
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좋은 프로젝트나 음흉한 사기는 종이 한 장 차이기 때문이다. 본래 사기라는 것은 유
혹적이어야 성립되고 그럴듯하고 당연해보여야 손님이 생기는  법, 나는 그네들에게 턱없는 의심
을 받아도 단 한 번 서운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의욕이 넘치는 뜨거운 가슴을 허욕이
가득 찬 새빨간 속셈으로 비치게 한 우리 사회의 수많았던 범죄인의 미울 뿐이다.
    위험한 장사가 돈 많이 남는 장사
  여하튼 꼭 성공해야 했다. 절대로 실수할 수 없다는 테  생각이 미치자 자연히 내 사고는 안정
성이 있으며 수익성도 큰 쪽으로  몰두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안정성이
있으면 수익성이 작고, 수익성이 크면 안정성이 없게 마련이어서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래서 "위험한 장사가 돈 많이 남는다"는 유행어가 생긴 모양이다. 생각에 몰입하던 나는 그래
도 그러한 속성에서 가장 벗어난 것이 먹는 장사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다음장에
서술토록 하고 그러한 결론 속에 나는 시내를 몇 바퀴 돌며 내가 가진 자본으로 할 수 있는 작은
음식점들을 둘러보다가 군시절 생각해둔 분식점을 겨냥, 기존의 분식잠들을 관찰하였다.
  기껏해야 대여섯 평에 막 책상을 몇  개 들여놓고, 낡은 그릇에 마구담아 나오는  음식, 손님이
들어오거나 나오거나 흘끗흘끗 쳐다보기만 하는 주인님들,  길거리 여기저기 리어카 하나에 오뎅
솥과 떡볶이 철판 하나 걸어놓으면 그게 분식집이었다.
  그래, 역시 내 생각이 맞아!  만약에 저런 떡볶이, 김밥 나부랭이를  괜찮은 분위기의 가게에서
운치 있는 음악을 틀어주고, 깔끔한 음식에 친절한 서비스로 대해준다면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고 누가 알고도 다른 곳을 선택할까?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복덕방을 돌며 가게상황을 알아보았
다.
  시내중심지라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내 사정을 얘기하고 조금은 자리가  떠도 가격이 저렴한
가게를 알아보느라 며칠을 소비한 끝에 천우신종인지 노력의 대가인지 권리금도 없고 이제 막 건
물을 지어 세를 놓기 시작한 이는 선배의 친구분 가게를 부족한 돈은 시설이 끝나갈 즈음에 내기
로 하고 임대했다. 이제는 저금  모자란 임대보증금과 시설비만 있으면  모든  게 순조롭게 끝날
일이었다.
  임대계약서를 손에 들고 난생 처음 돈을 빌리러  뛰어다녔다.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이들이 조
금씩 돈을 빌려주었다. 일이 풀리려니 돈이 없어 시설을 멈출 상황인데도 시설을 맡아 해준 선배
님이 자신이 조달하여 위기를 넘겨주었다.
    TV드라마 제목을 따와서 '보통사람들'이라고
  시설을 시작한 날부터 나는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틈만 나면 담배를 물고  사업계획에 몰두했
다.
  상호는 '먹구삽시다'라고 생각해두었다.  그러다가 ㄴ너무 시대를  앞지른 상호같아(지금쯤이면

사한 상호겠지만) 다시 바꾸었다. 내 이름이 강석구고 한창 '보통사람들'이라는 TV드라마가 인기
가 있었으며,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탤런트 강석우였다.
  어차피 싼 음식이고, 부담 없는 가격에 일반 보통사람들을 위한 외식장소니 '보통사람들'로
상호
를 결정, 드디어 '보통사람들'이 탄생되었다(몇 년 후에 노태우 대통령의 단골 테마가 되었지만).
  그 후 십여 년 동안 대전 보통사람들은 10∼30대까지의 대전사람 70∼80퍼센트가 알고 있는 유
명한 식당이 되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을 쓰고자 함은 식당업을 성공하기까지의 과정과  내가 창조해서 실현
한 방법 또 그 효과, 그리고 미리 알고 했더라면 손해보지 않아도 되었을 경험들을 이제 막 사
회의 저 끝에서 성공을 꿈꾸며 온밤을 고심하는 젊은이들과 긴 날을 몸담아왔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솔직담백하게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행로가 순조로울 수 있도
록 일조하고픈 욕심 때문이다.
  비록 자신이 몸소 겪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의 경험은 곧 자기 앞에 펼쳐질  현실의 다양한 요구
와 닮은꼴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귀를 열고 진지하게 경청해둘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아
이템이란 기존의 인식에서 180도 회전이 아니라 15도 정도의 약간의 변화가 바람직하다).
    작은 바람 속에서...
  웬만큼 생활의 여유가 생긴 어느 날부터는 몇  가지 작은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책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주위에서 장사를 시작하고 싶지만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해하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특히 군생활이나 교육자생활을 오래 하고 사회에 나온 분들의 장사에 대한 무
지는 정말이지 지팡이 잃은 장님을 연상케 할 정도다.
  그래도 남들 다 하는데 내가 못할 게 무어냐 하는 뱃심으로 시작을 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 결
과는 대부분 참혹한 패배가 대부분인 것이다.
  여유 있는 사람이 여유자금으로 부업 삼아 장사를 하다가 실패를 한다면 별일이 아니라고 할

있지만 대부분은 장사를, 특히 먹는  장사를 시작하려 마음먹었다면 십중팔구  장사가 잘 안되면
바로 곤란을 겪을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나의 주위에 이런 분들이 적지 않음을  감지했고 그분들의 쓰라린 실패를 보면서도, 누구
하나 감히 나서서 도울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과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변변한 책 한 권이 없
다는 사실에 이르자, 비록 크게 성공하지도 여러 사람이 알고 있지도 않은 미미한 존재이지만 요
식업에 많은 시간을 종사했고 그  일의 성공을 위해 깊은 고뇌와  연구가 있었고, 그러한 것들을
장사에 접목시키면서 느끼게 된 여러 가지 효과와  결과들, 그리고 전혀 예기치 못했던 시행착오
들, 또한 잎으로 진행될 미래의 음식업 흐름 등을 음식업을 준비하거나,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있
는 그대로 보여줘서 그들이 염원하는 성공에 다가갈 수 있는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으리란 기대
로 이 책을 감히 쓴다.
  될 수 있으면 실현가능한(시중에 책들도 많이 나와 있지만 거의, 아니 전부가 어떠한 이론적인
제시, 혹은 추상적인 제시만을 하고  있고 요즈음엔 신종사업정보나 체인업체  소개로 국한된 거
같다). 현실적으로 바로 접목할 수 있는 장사의 지침서를 하나 만들고 싶었다.
  그러한 책은 장사를 막 시작하는 이들에겐 더없는 구세주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대
부분 그들은 모두 내가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때 가졌던 막연한 불안감과  막막함을 지니고 있으
므로).
  또 하나의 꿈으로 나의 옛 꿈은 포기했지만 그에 대한 미련 또한 적지 않아  지금도 노래 잘하
는 가수가 TV에 나오거나 길에서 그  음악을 들으면 갈 길을 잊고  푹 빠져버리곤 한다. 그러나
이젠 다 잃어버린 꿈이다.
  노래란 적어도 기능이다. 선천적인 끼도 있어야 하지만 닦고 또 닦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한창
때는 팝송만큼은 대한민국 어떤 가수한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시절도 있었다. 언제부터
인가 난 옛 음악에 대한 향수에 젖어들곤 한다.
  그래서 나는 레코드를 딱 한 장 내고  싶다. 우리 나이 또래들이 사춘기시절(그때가 가장 음악
이 아름답게 들릴 나이이므로)에 좋아했던 곡들을 묶어 아침부터 비가 오거나, 커피를 마시고 싶
을 때, 심하게 주위가 조용해서 괜스레 센티해질 때, 흑백사진의 앨범을 뒤적일 때  듣고 싶은 그
런 레코드 한 장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언제라도 그 음악을 들으며  그 옛날 교복 입던 시절 그  애를 기다리던
낡은 빵집 창문 밖으로 펑펑 내리던 하얀 눈, 김이 모락모락 나던 노란 양은 주전자, 두손으로 꼭
감싸쥐고 호호 불며 마시던 소독약 냄새나는 엽찻잔,  고교시절 열기로 가득 찬 여름바다까지 기
억에서 끄집어낼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먹는 장사를 시작하는 이에게
  나는 이 책에서 사업(먹는 장사)에 필요한 모든 상식과 주의사항, 그리고 주력상황 등을
제시하기 위해 잡스러운 지난날의 이야기 등은 제거하려 했으나 필자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내가 밟아온 시간들을 대강 생각나는 데로 옮겨보았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혹 크게 성공한 사람의 자서전으로 비춰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는데 거듭 밝히지만 나는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고, 도한 현재 큰
부자도 아니다. 다만 나의 처지를 비추어볼 때 다소 만족할 만한 현실임은 굳이 숨길 마음이
없다.
  난 소설가도 아니고 유명인사는 더더욱 아니기에 내 책이 어떤 문학적 차원에서 평가되고,
이론상 이치가 맞지 않는다고 얘기되는걸 원치 않는다.
  난 단지 한 명의 장사꾼이요, 장사꾼이 되어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나 한
사람의 경험일지라도 여러 사람에게 참고가 되고 지침이 된다면 내 개인적으로는 더할나위없는
행복이요, 우리 가문으로서도 커다란 영광이기에 아주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글을 써 봤을 뿐이다.
  이 책은 교과서도 아니요, 자서전도 아닌 한 장사꾼의 내 이웃에 대한 조언이요, 경험담이요,
충고다.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준 '보통사람들'
  '보통사람들'이라는 글자는 나에게는 대단히 의미 있는 글자이며, 고마운 글자이다. 나는 이
식당으로 인해 많은 여유로움을 얻었으며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보다 성장한 인격을 갖출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온갖 회한이 서린 나의 역사다.
    뭐 맛이 없다구?-조바심에 잠을 설치며
  1985년 5월 '보통사람들'이  처음으로 문을 여느 날,  난 마치 미친 말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

전날 왁스를 발라놓은 바닥의 윤기가 마음에 안 들어 봉걸레를 들고 닦고 또 닦았다.
  화장실 타일에 묻은 검은 페인트 두세 방울을 지우느라 진땀을 흘렸고, 양념통 하나하나를
윤이 나도록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음악의 크기를 조절하고 가게 앞을 말끔히 쓸어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이윽고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댄 마치 시험결과를 발표할 때처럼 입에 침이
바짝바짝 마르고 긴장되었다.
  주방으로, 홀로, 계산대로 왔다 갔다 하며 도와주는 안 식구와 두 명의 주방직원들,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개업을 맞이했다. 첫날이라 당황도 했지만, 음식맛이 없다는 말이 나오자 나는
정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날 저녁 쫄면장을 다시 만들어봤다. 이것도 넣어보고 저것도 섞어보고, 한두 시간 가량
시간이 지나자 제법 그럴듯한 맛이 났다. 그 다음날 첫날보다 많이 보완된 주방음식들은 곧
손님들의 맛있다라는 반응을 끄집어냈다.
  나는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계산대에서 음식값을 지불하고 밝은 얼굴로 문을 나서는
손님들이 늘어갔다. 오는 손님마다 가게 분위기가 좋다,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됐다, 이젠 된거야.' 개업 전날의 조바심에 잠을 설쳤던
수많은 밤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친다.
    실내장식 본인의 소신도 다소 필요하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면서 매상은 자꾸 올라가고 있었다. 안개가 짙게 낀 어느 가을날
아침에 나는 가게 근처의 커피숍에 앉아 두세 달 전의 나를 생각해보았다.
  실내장식업자는 나의 끝없는 간섭에 굉장히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에 개의치 않고 나는
많은 부분을 내 생각대로 요구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인테리어업자의 고정관념과 자기 과신을 우려한다. 실내장식이란 정해진
방법이 없다. 그 업소가 요구하는 고개그이 수준 및 연령 등을 고려해야 하며 그 점포의 생김새,
주변과의 조화 등을 참작해야 하는 참으로 어렵고도 예민한 작업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소재가 없기 때문인지 대충 눈짐작과 어렴풋한 지식으로 작업을 맡고 있는
실내장식업자도 적지 않다.
  이러한 업자들로 인해 야기되는 수많은 문제점을 우리는 수시로 목격할 수 있다. 뒤에 또다시
언급되겠지만 이 실내장식은 정해진 가격도 없지만 그때 그때의 상황에 다라 가격이 움직이는
성격을 갖고 있기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가격의 정당성도, 재료의 단가도, 작업의 소요기일도
파악하기 어렵고, 사전에 업자와의 약속이 있었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상황으로 말미암아
실현되기란 열에 한둘인 것이다.
  그것은 실내장식업자가 꼭 부도덕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 실내장식이라는 작업 자체가 그만큼
가변적이고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자주 발생할 소지가 크다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실내장식업자의 선정이란 대단히 어려우며 곤혹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여러 명의 업자 중에는 자신의 작업에 혼신의 정열로 마치 예술품을 대하듯
자신의 감각을 쏟아 붓는 장인정신을 가진 업자도 간혹 있었다. 이들은 최소한의 대가만을
요구하며 자신의 간간이 살아 표현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는데 그 모습은 보는 이의
입장에서 참으로 감격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어쨌든 시설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거론토록 하고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유치원 아이들 그림으로 벽을 장식
  시설업자의 편치 않은 눈길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설을 내 생각대로 진행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실내가 훤히 보이는 유리로 전면을 붙인 식당이 한 군데도 없었기에 통유리를 끼우고
사무실에서만 쓰던 블라인드를 달았다. 등받이가 없는 2인용 의자를 만들어 홈을 파고 다이미를
끼웠다.
  가게 폭이 좁아서 붙박이 의자로 한쪽 벽면을 채웠다. 그것은 한 명의 손님이라도 더 받으려는
욕심도 있었지만 4인용 의자로 빽빽이 채워진 기존 식당들의 흐름이 싫었기 때문이다.
  천장에는 형광등을 달고 양옆의 형광등 위는 노란 아크릴박스를 입혀서 저녁이면 가운데
노출형광 등을 끄고 아크릴 안의 형광등만 켜니 홀 안이 노란 색으로 보여 아주  분위기가
있었다(그것은 다른 조명을 쓰는 것보다 효과가 컸으며 전기세 절감에도 한몫했다). 스피커를
화장실(대변기 위쪽 천장 속)에도 설치, 화장실 벽면의 그림액자와 함께 짧은 시간이라도 즐겁게
유도했으며(분식집으로 아마 한국 최초?). 아이들 그림은 왠지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유치원생들의 그림을 벽면에 걸어두니 손님들이 굉장히 재미있어했다.
    손님을 위한 세심한 배려와 양심적인 상술
  크리스마스 때는 그때만 해도 흔치 않던 컴퓨터로 손님의 이름을 입력해 프린터로 뽑아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었으며 여자 단골손님에게는 스타킹을 한 족씩 선물했다. 다른 식당들은
식사 후에 껌을 주었으므로, 식상한 손님들을 위해 박하사탕을 주었고, 여름에는 각종 화채(수박,
복숭아, 포도)를 만들어 원가에 판매함으로써 조그마한 불평도 안 한 번 소홀히 대한 적 없이
즉시 시정해서 그 손님이 다시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손님이 놓고 간 물건을 기재해 가게 전면에 부착해서 찾아가도록 했으며 전화요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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