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부의 상징은 무엇일까? 호화 주택과 최고급 승용차, 자기 소유의 넓은 토지, 창고에 가득 찬 곡식, 값비싼 보석과 장신구들인가?
진정한 부는 재산의 크기만으로는 측정될 수 없다.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자나 깨나 불릴 생각에만 골몰하고 쓸 줄을 모른다면 그는 물질의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일 뿐이다.
진정한 부는 어디에도 막힘이 없는 자유로운 삶을 구가하는 데에 쓰여지기 위해 존재한다. 아무런 부족함 없이, 주어진 자질과 능력을 세상에 기쁨으로 풀어놓고 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자’가 아닐까.
단지 나에게로, 내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자기만의 높은 성 쌓기에 골몰하는 부는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가 쌓은 부는 그것이 무너지고 났을 때의 허망함을 그에게 안겨주기 위한 예비공작일 뿐이다. 잔뜩 쌓아두어도 노년에 이르면 자식들의 유산 다툼을 일으키는 분란의 씨앗이나 되기 십상이다. 기껏 모았지만 그렇게 애써 모아 보았자 헛된 노력이었음을 절감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은 다음 세상에서라도 부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고, 찢을 때가 있으면 기울 때가 있으며, 쥘 때가 있으면 펼 때가 있는’ 운명의 고저장단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운명호의 선장은 짓궂기 짝이 없어서 운명의 배에 승차한 선원들을 누구든지 흔들리게 하기 일쑤다. 선장의 목적은 한 가지다. 아무리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도록 저마다 중심 잡는 법을 터득하게 하는 것.
물질 위주로 펼쳐지는 이 세상에서 운명의 선장은 특히 돈을 주었다 빼앗기를 잘 한다. 돈이 많이 벌리면 자존심도 올라가지만, 돈이 없어지면 자신의 존재 가치가 지옥에라도 떨어진 듯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긴다. 따고 잃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돈과 자신의 가치를 일치시키지 않고, 존재의 진정한 의미에 눈을 돌리게 된다.
돈이라도 다 똑같은 돈이 아니다. 눈 먼 돈이 있고, 정직하고 깨끗한 돈이 있다. 갖는 것이 오히려 화를 불러오는 돈이 있고, 갖고 누리고 베풀 만한 이유와 근거를 가진 돈이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제대로 이루고자 한다면,
운명의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을 부를 누리고자 한다면,
끌어당기는 자의 위치 에너지를 먼저 높여야 한다.
운명의 선장에 농락당하지 않도록 확고한 중심을 잡을 줄 알아야 한다.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끌어당긴다고 해도, 많은 것을 효과적으로 잘 끌어당기려면 끌어당기는 힘이 세야 한다. 자석의 가우스가 높아야 한다.
하지만 이 자석은 일방적으로 끌어당기기만 하는 자석이 결코 아니다. 이 자석은 먼저 자신의 생각 에너지를 내보내고, 증폭되어 돌아오는 같은 종류의 것들을 받아들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 에너지를 다시 세상에 내보낸다.
많은 것을 잘 끌어당기려면 내보내는 에너지가 먼저 강해야 한다. 어떤 것을 어떻게 끌어당길 것인지에만 연연해서는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중심이 먼저 튼튼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베풀 자원이 넉넉해야 하고, 판매원은 소비자의 이익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제품의 정보에 통달해야 한다. 정치가는 민중들이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면서 베풀거리를 중심에 쌓아놓아야 한다.
중심이 튼튼한 ‘끌어당김’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많은 유익함을 자신에게 되돌려주지만, 중심이 허약한 ‘끌어당김’은 금방 허물어질 성(城)과 같다.
그럼에도 모든 인간적인 지식과 마음가짐보다 더 강력한 ‘중심’을 갖출 수 있는 길이 있다. 무엇이 무너지지 않을 영원한 중심인가? 우리 안에 본래 자리하고 있는 신성한 에너지이다. 우리 안의 신성한 에너지를 일깨우는 일이야말로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중심’에서부터, ‘중심’으로, ‘중심’에 의해서, ‘중심’을 위하여 살게 한다.
이 ‘중심’을 깨우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언제까지나 운명의 노예로서 희롱당할 뿐,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사납게 날뛰는 운명의 갈기머리를 붙잡고 운명을 부리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신성한 중심을 깨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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